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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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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비의 시계와 같은 장개석과 리종인의 관계
2015년 10월 11일 11시 14분  조회:5300  추천:0  작성자: 넉두리

기념비의 시계와 같은 장개석과 리종인의 관계

 
(번역)



 
 
내우외환의 처지에 놓인 장개석(蒋介石)은 깊은 밤에도 잠을 이룰수 없었다. 1949년 11월 20일 오후 3시 30분에 백숭희(白崇禧)는 리종인(李宗仁)의 명령을 받고 중경에 와서 리종인이 이미 오전에 비행기를 타고 향항으로 날아갔다고 장개석에게 보고했다. 리종인이 직권도 인계하지 않고 위병이 재발했다는 리유로 병을 치료하러 향항으로 갔다는것이다. 장개석은 그날 저녁에 중경에 있는 국민당상무위원들과 상의한후 먼저 향항으로 사람을 파견하여 리종인을 중경으로 데려오기로 결정했다.
장개석이 무엇때문에 그토록 급히 리종인을 중경으로 데려오려고 했을가? 겉보기에는 대통령자리를 내놓은 장개석이 도량이 넓어서 애써 리종인대통령대리의 사업을 협조하는것처럼 보였다. 장개석자신도 대외에 그렇게 선전했고 시국을 똑똑히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장개석이 리종인을 중경으로 불러오려는것은 공동히 군사계획을 상의하려는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간단한것이 아니였다. 리종인이 중경에 가는것을 재삼 거절한데는 그로서의 도리가 있었다. 내부의 사람들은 리종인이 중경에 온다고 해도 군사지휘권은 장개석에게 있다는것을 알고있었다. 자리를 내놓았다는것은 자리에서 물러났다는것이 아니다. 리종인은 장개석의 조종을 받는 괴뢰대통령이 되기 싫었던것이다. 또한 장개석에게 끌려 낭떠러지로 떨어지고싶지 않았다. 열흘전에 장개석은 대만에서 리종인의 일로 국민당원로 오치휘(吴稚晖)에게 고견을 물었을 때 오치휘는 “절대 리종인으로 하여금 정치상의 책임에서 벗어나게 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했다. 장개석은 이 말을 정중하게 일기에 써넣었다. 지금 대세가 기울어지고 중경이 함락될 위험이 눈앞에 닥쳐오게 되자 장개석은 리종인을 끌어다가 희생양을 삼는것보다 더 합당한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리종인도 장개석의 이런 의도를 간파하고 중경으로 오지 않았던것이다.
그날 오전에 장개석은 또 백숭희를 만나서 자신이 다시 리종인의 대통령직을 빼앗을 뜻이 없으니 리대통령대리를 중경에 청해 함께 국가대사를 상의할것을 간곡하게 요구한다고 표시했다. 리종인의 대표로서 “제갈량”이라고 불리우는 백숭희는 장개석의 앞에서 대답도 하지 않고 묻지도 않았으며 모든 문제에 대해 태도표시를 하지 않았는데 그 뜻은 아주 명백했다. 자신은 다만 말을 전하는 전달자일뿐이라는것을 말해주려는것이였다.
혀바닥이 마르도록 설득하던 장개석은 백숭희가 한마디 말도 하지 않자 화가 나서 나중에는 리종인을 국가가 혼론에 처한 사태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고 마구 질책했다. 그러면서 국가원수의 명의로 병치료를 하기 위해 출국하지 말아야 한다고 꾸짖었다.
“리대통령대리는 개인의 신의와 인격을 다 말아먹었으니 대체 무슨 심보란 말이요? 리대통령대리가 해외에서 추태를 보이는것을 피면하기 위해 꼭 중경으로 돌아오게 해야 하오. 그가 와서 대내외의 대계를 책임져야 할것이요. 그 다음에 출국해도 될것이요. 그러나 반드시 행정원장이 대통령직을 대행해야 되오. 이는 헌번규정에도 부합되는것이요.”
장개석의 뜻은 아주 명백했다. 리종인이 출국은 할수 있지만 반드시 “대통령”직을 내놓아야 한다는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장개석은 다른 사람이 대통령권자를 점하고있는것이 마음 편하지 않았던것이다. 옹근 국민당청사가 모두 넘어지게 되였는데도 장개석은 의연히 썩은 나무에 걸어놓은 “대통령간판”을 항상 마음에 두고있었다.
지혜가 풍부하고 계략이 많은 백숭희는 장개석의 히스테리에도 한마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을 대신해 욕을 먹으면서도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 배역”을 성공적으로 연기했다. 침묵을 지키는 백숭희의 책략은 원래 더 큰 화를 내려는 장개석에게 다시 분통을 떠뜨릴 상대를 찾지 못하게 했다. 장개석은 혼자서 욕설을 퍼붓다가 제풀에 뭣해서 화를 가라앉히였다.
후에 장개석은 또 국민당중앙의 명의로 거정(居正),  주류선(朱骝先), 홍란후(洪兰友) 등 원로들을 대표로 파견하여 자신이 리종인에게 주는 친필편지를 향항에 가지고가서 리종인을 중경에 돌아오도록 권고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장개석은 대통령대리직을 가지고다니면서 가는 곳마다 자기의 주장을 말하는 리종인이 매우 못마땅했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장개석은 그날의 일기에 이렇게 썼다.
“덕린(리종인의 자)은 출국했는데 사직도 하지 않고 자리를 내놓을 뜻도 없이 대통령대리의 명의로 미국에 지원을 요구했다. 그러나 지원요청을 이루지 못했는데도 국외에 머물면서 돌아오려고 하지 않는다. 당국(党国)의 존망도 아랑곳하지 않고 리해타산만 앞세우는 그의 행위는 비렬하고 무치하기 짝이없다!”
장개석은 리종인에 대해 큰소리로 욕설을 퍼부었지만 리종인은  그 일에 관해 《회억록》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국가대사를 관심하지 않은것이 아니였지만 나는 어려운 형세를 되돌릴 힘이 없었다. 내가 개인의 건강을 돌보지 않고 국내에 남아있어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다가 일단 나라가 망하고 이 몸이 죽는다면 그런 희생은 홍모보다 가볍다. 그럴바에는 빨리 병을 치료하여 목숨을 건지는것이 나을것이다. 그렇게 되면 앞으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기회가 있을것이다. 때문에 나는 미국에 가서 병을 치료하기로 결정했다.”
리종인은 여기서 그와 장개석간의 정치투쟁중의 진실한 의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중경에 돌아가지 않은 원인을 “미국에 가서 병치료를 했기때문”이라고만 썼다.
장개석이 중경에 있는 기간에 리종인은 한번도 중경으로 가지 않았다. 당시의 중경신문에는 “두 대통령이 앞으로 제2의 수도에서 함께 일하게 될것이다”는 글이 대문짝만하게 실렸는데 그런 예언은 현실로 되지 못했다.
중경에 세워진 해방비는 처음에 “정신보루(精神堡垒)”라고 불리웠는데 항전중국민정부가 중경에 옮겨온후에 건조된것으로 “국민정신총동원”이란 뜻이 있다. 건축물은 정방형인데 3층높이의 포루이다. 일본비행기의 폭격을 방지하기 위해 겉에 검은칠을 했고 꼭대기에는 한폭의 기대(旗杆)를 세웠다.
항일전쟁이 승리한후 부루를 “항전승리기념비”로 고쳐 지었는데 비의 몸체는 8각기둥형이고 외부는 부각(浮雕)으로 장식되였다. 건물안에는 꼭대까지 닿는 회전계단이 있으며 꼭대기에는 4개의 방향으로 향한 4개의 “표준시계”가 있었다. 그러나 이 시계들의 시간은 정확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항간에 “기념비의 시계는 제 각기 간다”는 말이 나돌았는데 그 뜻은 장개석과 리종인의 불합작관계를 의미한것이였다.
 
 
 
 
 
  
 
 
장개석의 국민당은 왜서 실패했는가


일본이 투항한후 국민당과 공산당이 중경담판을 할 때 민주와 자유를 바라는 지식분자들은 중국에서 응당 서방식의 자본주의길을 걸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후 그들은 모두 공산당을 지지했다. 이는 무엇때문인가?
항일전쟁이 승리한후에 대부분의 중국인은 3가지 요구를 가지고있었다. 첫째는 내전을 중지할것을 요구한것이다. 여러해동안 전쟁에 시달렸기에 더는 전쟁을 해서는 안된다는것, 중국인끼리 싸워서는 안된다는것이다. 둘째는 련합정부를 성립할것을요구한것이다. 국민당이 혼자서 집권하는 국면을 개변하여 각 당파가 모두 국가정치에 참가하는 정부를 성립해야 한다는것이다. 셋째는 국가민주화와 군대국가화를 요구한것이다. 즉 국가는 응당 민주의 방향으로 발전해야 하고 군대는 당파의 소유가 되지 말고 응당 국가소유에 귀속돼야 한다것이다.
그러나 국민당은 이 3가지요구를 하나도 실행하지 못했다. 첫째, 항일전쟁이 끝나자마자 곧 국공내전이 시작되였다. 둘째, 국민당은 모든 당파를 단합하여 하나의 련합정부를 성립하지 못했다. 후에 작은 당파인 민사당(民社党)과 중국청년당이 국민당을 따라 국민당의 국민대회에 참가하였지만 더욱 많은 민주당파와 무당파인사들은 공산당과 합작했다. 셋째, 국민당의 군대는 이름을 바꿨으나 성질은 개변되지 않았다. 북벌초기에 “당군(党军)”이라고 불렀고 1944년후에 “국민혁명군(国民革命军)”으로 이름을 바꿨으며 1945년후에 “국군(国军)”이라고 칭했다. 그러나 국군은 국민당정책을 집행하는 군대였다.
국민당이 실패한 원인중의 하나는 항일전쟁이 승리한후 전국인민의 3가지요구 즉 내전을 중지하고 련합정부를 건립하며 국갑민주화와 군대국가화를 실행하는 요구를 위반했기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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